김삼의당 한시모음

[스크랩] 여류시인 -古硯 김삼의당(金三宜堂)-

한문역사 2015. 3. 31. 22:09

 

 

 

 

여류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


조선시대에서 여성으로서 문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사대부가의 부인들이거나 황진이, 이매창 같은 기생들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시간적·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생활환경으로도 문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삼의당(金三宜堂) 처럼 여염(閭閻)집의 평범한 부인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문학이란 자유롭고 여유가 있는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문학을 하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여염집 여인으로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드는 일이었다.

김삼의당(金三宜堂)은 남원이 낳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사대부가의 여인도 아니요, 황진이나 이매창 같은 기녀도 아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여염집 여인으로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전원의 풍치를 생애(1769년∼1823년)를 통해 260여편의 많은 한시와 산문으로 남겨 놓았다. 그는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가정에 묻혀 살았던 여인이기에 그의 생애와 시상(詩想)을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며, 이름마저 남기지 않고 당호(堂號)로만 전해오고 있다. 그는 부부의 애절한 정과 농촌의 어려운 가정생활, 규방 안의 예절과 우리고장 남원의 풍치를 주옥같은 언어로 표현한 시로 남겼다.
 한학자(漢學者) 김달진은 역대 한시(漢詩)를 골라 번역한 그의 저서 [한국한시] 전삼권중 제3권에 여류 한시를 모았는데 김삼의당 작품 59편, 신사임당 작품 30편, 황진이 작품 5편이 실려 있어 남원이 낳은 삼의당 김씨야말로 문학계의 보배와 같은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삼의당은 자신이 남원에서 나고 자란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남원의 인심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한 분이다. 그런 점에서 삼의당은 진정으로 남원의 자랑스런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삼의당의 생애와 작품세계

삼의당 김씨는 조선조 영조 45년인 1769년 10월 13일에 남원의 서봉방(棲鳳坊:동촌, 창동, 장동, 구암, 교촌, 장승, 정치, 신기, 화산, 대정, 감성, 금강 등 12개 리를 관할 한 남원성 밖의 구역으로 지금의 향교를 중심으로 서남쪽의 향교동과 신정동, 화정동, 대산면 금성리 등에 해당한다)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연산군때의 학자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의 후손으로 부친은 인혁(仁赫 ?)이다. 여성에게는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당호(堂號)로만 전해져 오고 있는데,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같은 분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나이 18세에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결혼했다. 하립은 진주 하씨(晋州河氏)로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12대 손이다. 그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친가 규수시절(1769년 출생에서 1786년 결혼까지)와 남원 시가시절(1786년 결혼부터 1801년 진안 이거시절까지) 그리고 진안 정착시절(1801년 진안 정착부터 1823년 죽음까지)로 나눌 수 있다.

친가(親家) 규수(閨秀)시절

삼의당의 친정집은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의 글공부는 가르치는 남원의 한 빈곤한 농가였던 것 같다. 삼의당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한글로 된 소학을 읽고 문자를 배워 제자백가를 대충 섭렵했다'는 삼의당 김부인 유고(三宜堂 金夫人 遺稿)의 자서(自序)를 통해서 보면 그 집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는 그녀는 서당의 담벼락에 몰래 붙어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문자를 터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삼의당은 스스로 글공부에 힘을 기울여 혼인하기 전에 이미 규방의 법도를 바르게 익혀 부덕을 고루 갖추었고 문학에도 상당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머리를 올리는 날에                 年 吟

깊숙한 규방에서 나고 자라나           生長深閨裏
얌전하게 천성을 지켜 나가네           窈窕守天性
일찍이 내칙편을 일은 끝이라           曾讀內則篇
집안 살림 꿰뚫어 알고 있다네          慣如家門政
어버이께 마땅히 효도 다하고           於親當盡孝
지아비께 반드시 공경하리라            於夫必主敬
잘하는 일없지만 잘못도 없어           無儀亦無非
순종함을 정도로 삼을 뿐이네           惟順以爲正
어려서 성인의 책을 읽어 왔기로       早讀聖人書
성인의 가르치심 능히 알겠네           能知聖人禮
삼천 가지 많고 많은 예의 가운데      禮儀三千中
남녀의 구별이 가장 자상해              最詳男女別
남자는 안살림을 말하지 않고           南不言乎內
여자는 바깥일을 말하지 않네           女不言乎外
안과 밖을 구별해 놓으셨으니           內外旣有別
성인의 가르치심 좇아가리라            當遵聖人戒

이 시는 삼의당이 열 다섯 살이 되던 해 성인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계년음( 年吟) 3수(三首)중 일부다. 이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삼의당은 일찍이 내칙편을 읽고 성인의 글을 읽어 사대부가의 규수 못지 않은 지식과 예법을 익혔고, 스스로 올곧은 주부의 길을 가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또, 화만지(花滿枝)에서처럼 어린 시절 고향 남원성의 아름다운 풍치와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는데,

 활짝 핀 꽃가지                     花 滿 枝

대방성 위의 달은 눈썹 같고             帶方城上月如眉
대방성 아래 꽃은 흐드러졌네           帶方城下花滿枝
피었다 시드는 꽃 나는야 싫어          生憎花開芳易歇
기약하고 오는 달 부러워하지           每 月來長有期


이러한 그녀의 시에서 보듯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면서 부녀자로서 바른 길을 걸어야 하는 부도를 익혔고 문학에도 상당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던 조선시대의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그녀의 시문을 묶어 편찬한 <삼의당 유고(三宜堂 遺稿)>의 자서(自序)에서,  

나는 호남의 한낱 어리석은 부인네로서 깊은 안방에서 나고 자랐다. 비록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배우지 않았지만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읽어 깨우쳤고, 한문을 배워서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었다(余亦湖南之一愚婦 生長深閨 雖不博經史 獵以諺讀解小學 推通文字涉 獵諸家) 고 하였다.

남원 시가(媤家)시절

삼의당은 남원에서 결혼하여 시가에 있을대 신혼의 단꿈을 버리고 궁핍한 살림에 시부모 모 시는 일과 남편의 입신양명(과거급제)을 바라는 정성어린 기원은 뼈에 사무친 절규였다. 삼의당이 혼인을 한 것은 열 여덟살이 되던 1786년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에 사는 하씨 집안의 셋째아들인 립으로, 삼의당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다.

삼의당 유고를 보면,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으니, 기축년 10월 13일이었다. 같은 고을 같은 마을에서 살았으니, 남원 서봉방의 한 마을이었다. 병오년 봄에 혼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같은 하늘이 맺어준 부부는 고금에 드물었다

(生於同年月日 己丑十月十三日也 居於同邑同里 南原棲鳳坊一里也 丙午之春 行儷皮之禮 爲夫位婦 天定配匹 古今 有).
                                                               <卷之一, 于婦日記話>

혼인은 삼의당의 생애에 있어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전기가 되는데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역할에 대해 시집가는 첫날부터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하나 하나 미리 정해놓고 그대로 실천에 들어갔다. 그녀가 혼인을 얼마나 감격적으로 맞이했는가는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혼인하는 날 밤에  

열 여덟 신선낭군 열 여덟 신선 낭자             十八仙郞十八仙
동방화촉 밝히니 좋고도 좋은 인연               洞房華燭好因緣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동네 살았으니            生同年月居同 
이 밤에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오                  此夜相逢豈偶然

부부의 만남에서 백성이 생겨나고                配匹之際生民始
군자도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하오                君子所以造瑞此
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                   必敬必順惟婦道
이 몸이 다하도록 어기지 않으려오               終身不可違夫子

라며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울에 가는 남편에게(贈上京夫子 九首中 二首) 라는 시를 통해보면, 

    서울에 가는 남편에게                      贈上京夫子

뜻을 세운 선비님 집안일 잊으셔야죠             志士當年不顧家
가난한 집에도 귀히 된 이 많다오                席門多有建高牙
헤어지는 마당에 옛일들을 이르오니              臨分誦道前人事
금의환향 빛나실 날 어느 때일까요                錦何時鄕里  

 
당장의 어려움에 급급하여 때를 놓치지 말고 미래의 밝은 생활을 위해 노력하라며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보인다.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혀온 부도를 실천함으로써 이상적인 가정을 실현하고 남편을 성공시켜 기울어진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집념이 강하게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쉽지는 않겠으나 자신의 노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진안(鎭安) 이거(移居)시절

가난한 시골선비인 남편의 과거급제가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과거급제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고자 했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본래부터 가진 것이 없었던 터에 과거준비 때문에 더욱 생활이 어렵게 되어 그들은 고향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가 1801년 12월로 그들의 나이 32세 때였다. 농촌생활은 삼의당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 주었다. 남원에서도 농촌 생활이었지만 그대는 남편의 과거준비 때문에 농촌의 정서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여유있는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농촌의 한가한 풍경을 노래한 여러 편의 시는 이때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편이 산양에서 밭 몇 이랑을 사서 힘써 갈고 김매고 하였다. 내가 농사노래 몇 편을 지어 노래부르노라(夫子於山陽買田數頃 勤力稼穡 妾作農謳數篇以歌之 八首). 

 한낮이 지나니 햇빛이 따가워                       日己午日煮
 등에서 흐르는 땀 땅을 적시네                      我背汗適土
 잡초를 골라 뽑아 긴 이랑을 매고나니             細討 意長畝
 아가씨 시어머니 참을 내오네                       少姑大姑饗
 보리밥 기장밥에 국은 맛있어                       麥黍甘羹滑
 숟가락에 밥을 떠서 배를 불리네                    流匙矮粒任
 부른 배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撑鼓服行且歌
 배불리 먹자면 힘써서 일해야 하는 법이네           飽食在謹苦


진안으로 이주한 뒤 자연 속에서 그런대로 한가롭고 의미있는 생활이었지만,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삼의당의 생활은 힘들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전과 다름없이 며느리이자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집안살림과 농사일, 자녀 돌보는 일에 있어서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삼의당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나이 55세가 되던 1823년이었다.

여염(閭閻) 시인의 여운(餘韻)

삼의당은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연과 벗하여 목가적 생활로 여생을 보낸 여류시인이
며 모범적인 아내였으며, 며느리였고 한 어머니로서 가정을 지키는 전통적인 여인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조 말 남원이 낳은 여류문인으로써 역대 어느 문인에 비해 손색이 없는 분이다. 오늘 그의 모습은 모든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 그의 업적은 예향이라 일컫는 남원의 문화적 명성과 향기를 더해 주었다. 남원이 낳은 김삼의당이 남긴(260여편의 작품)업적은 서울대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통사>에도 거론되었거니와 이화여대는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란 과목으로 삼의당 김씨의 문학세계를 강의하고 있으며, 숙명여대와 한덕여대, 전주공업대학 등에서도 삼의당 김씨의 한시를 교재로 활용하고 있어 예향이라 일컬어지는 남원의 문학적 명성과 향기를 더해 주었고 특히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읊은 그의 문학은 지금도, 앞으로도 그윽한 예향의 향기를 드높여 줄 것이다.

남원문화원에서는 그녀의 문학세계와 생애를 더듬어 더욱 높이 빛내기 위하여 1991년 11월 15일 그가 태어났던 서봉방 부근의 교룡산 기슭 교룡산국민관광지에 시비를 세웠다. 지금 남원의 향토인들은 그녀가 살았던 마을 찾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당시 남원부 서봉방은 12개의 리를 거느린 곳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상 남원 향교를 중심으로 서남쪽의 향교동과 신정동, 화정동, 대산면 금성리 등에 해당되는데 김해 김씨의 세거지와 그의 유고집 중 농촌의 일년을 달거리체로 쓴 12월가(十二月歌)중 2월 상사일(二月 上巳)의 노래를 보면, 

          동풍에 수양버들 아련하게 푸르고          東風楊柳綠如烟 
        물굽이에 잔 띄워 소년에게 보내네         曲水流觴付少年 
        성밖에 미인들이 단장을 곱게 하고         城外紅粧多 艶 
        앞 냇가에서 목욕한다 소문이 도네         浴蘭消息又前川

이라 읊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수양버들, 성 밖, 냇물 등의 상황이 지금의 향교동 7통 유천(柳川)마을 주변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고노(古老)들의 증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유천마을 주민들은 김삼의당이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마을 회관 앞에 1999년 5월 28일 김삼의당 시비를 세웠으며, 앞으로 삼의당 정자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 참   고
삼의당 김씨의 생애와 문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그녀의 문집인 삼의당 김부인 유고(三宜堂 金夫人 遺稿)이다. 이것은 원래 삼의당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삼의당 자신에 의해 필사되어 전해오던 것을 삼의당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1930년에 광주에서 <삼의당 김부인 유고(三宜堂 金夫人 遺稿)>가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삼의당 김부인 유고(三宜堂 金夫人 遺稿)>는 순한문으로 된 2권 1책 30쪽 분량이다. 이 책에는 제 1권에 111편 235수의 한시, 제2권에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6편, 시작품의 앞부분에 쓴 서(序) 7편, 제문 3편, 잡문 6편으로 그 분량은 그리 많은 편이 못되지만 다양한 내용과 형식들이 두루 담겨져 있다.

 

사랑방 사랑방 -여강 최재효님의 블로그에서 펌해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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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에피큐리안
글쓴이 : 벨로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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