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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버지 (2015.8.17)

한문역사 2015. 8. 17. 17:47

버지, 

아버지께선  너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시고(1926년 음,11월 9일)

또  사셨습니다.

4남2녀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시어 아홉살에  어머니를,

열아홉살에 아버지를 모두 조실부모 하셧습니다

해방 한해전에는  일제에 강제징용되어 가셔서 

죽을고비를  수없이 보내시다가  마침내 해방이되어(1945년) 귀국하시고

또 5년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그해 여름 강제징집이 되어(6사단2연대)

 또다시 죽음의 전장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서는 이후 북진하여

평북 덕천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중 개성전투에서 폭설속에

양손에 심한 동상과 생인손을  앓으셔서 후송되신 뒤 다음해에

마산 제1육군병원에서 동상凍傷과 심하게 앓으신 생인손을 치료받으시고

의병제대를 하여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셧습니다.

이때  아버지와  함께  군에 가신 친구분들중  전사상자도 여럿분이 계셨

습니다.이후 약 스무달 뒤에 제가 태어났습니다(1952년 음 11월 20일.).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계실때엔 늘 한복을  즐겨  입으셨읍니다. 

조끼도  꼭  껴 입으시고. 무더운 여름철엔 삼베옷을 즐겨 입으셨습니다.

이  아들  장가보내실 때 그때 처음으로 양복을  마춤하여 입으셨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인터넷  닉네임으로  한문역사를  쓰는데

저  어려서부터  한문과 역사를  좋아하고  가까이  하게끔 배경을  만들어 

주신분이  바로  아버지  십니다.

저  초교 4학년때라  기억나는데  그때   역사와 한자용 사전을  사오셔서

제게  선물주신것을  똑똑히  기억이  난답니다.

김유신장군의 초상화와 약력,등 이  쓰여 있는책 이랍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려웠던  소년시절  못 배우신 공부恨을

이 아들만은 공부시켜 그 성공담을  보시고  대리만족을  느끼실려고 하신

 그  至極父性을   그땐  저  철이없어  미쳐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겪어신  고생만 해 온 농사일을 아들한테는  물려주지 않고

그저 손에  흙 안 묻히고  살수있는  공무원, 선생을 원하셧습니다 

아버지 생시에 그걸  이루어 드리지 못 했습니다. 

또한  그  만족감도  못해 드렷습니다.

저, 지금  곰곰히 생각하니 한없이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

우리집  큰방 선반위에는 늘 공책,과 연필 등 학용품이 놓여있었습니다.

공부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은 떨어지지 않게  언제나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의  뒷받침 이었습니다. 

제 초교 4학년때 낮은 책상도  사 주셧습니다.

공부하는데 드는 돈은  아낌없이 다 주셧습니다.

참으로 至高至純한 父母精誠 이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제가  초교에  다닐때부터  한문, 역사에는 

특히  애착심이 있어 그후 두과목 시험치면  언제나  100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버지. 어머니의 뒷받침으로  대구에서  중학교 진학할때 

그 당시  동네에선  제일 좋다는  암소를  팔아 학비를  대 주셨습니다 .

아버지, 

겨울용 땔감으로 밤숲에서 밤잎(栗葉)을  까꾸리로  끍어모으실때 

떨어져 있는 밤알을  주워서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집에 오셔선  제게 건네주시며 먹으라고  하셧습니다. 

또  제가  중학생  겨울방학때  뒷목에  종기가 나서 치료하러

배타고 강건너,재넘어 하빈면 기곡리까지 이 아들 손잡고 다니셨습니다. 

대구  서문시장에  함께 볼일보러 가실때면  꼭  저의  손을  잡아끌고서

시장통 안에 있는 소고기 국밥집으로  가셔서 함께 점심을  먹고

父子之情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아들손잡고  그곳에 가서  소고기국밥 한번 못 먹였습니다.

아버지,

이 아들  안동의 육군  36사단 훈련소가서  마치고  안동역전에서 (1974.11.23) 

훈련소까지  면회 오시어  이 아들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볼려고  하신,,

거기서  부산  육군병기학교로  갈때도  같은  열차인데도 

앞은  군용열차라  떨어져서  오시다가 대구역에 내려서  혼자서

귀가하셨습니다. 그후 이아들  파주 금촌의 2기갑부대에  배치되어 

얼마안가  천리길을 마다않고  기차, 버스 타고  면회실에  오셔서 

이 아들을  찾으셨습니다(1975.5.17) 

떡,  닭고기를  앞에놓고  부자지간  한동안  말없이  침묵만,    

결국  눈물을  지우셨습니다.

40년이  훨씬 지났어도 그때 그 일이 지금 제 눈앞에  선합니다. 

아버지, 저가  초교 2학년(단기 4293년)때  새 책 받아오면 비료포대로

책껍풀을  하시고는 철필(펜)로  잉크찍어  산수  2ㅡ1 구본훈 라고

써주신 그 책들을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고이  보관하고 있답니다 

또  누나의 초교1학년 (단기 4290년) 통지표부터 저희 6남매 통지표

등을 다  모아 둔 것도  아버지 정성이라 생각합니다.

또 제가 50년 넘게 일기를 써 온것도 아버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살아계실적 주위분들이  "  저  어른은  법 없이도  사실 양반 " 

이라고들 하셨답니다. 

 해방후(1945년) 야학으로 국.한문글짜를 깨치시고 또 시간이  날적마다

아버지의 재종형수 되시는 문국댁아지매(1897년생 파평윤씨)서당집으로

심부름 시키시며 소설책인 :심청전, 흥부전, 전우치전 등  책을 

빌려오라시며 호롱불 밑에서도 재미있으신 듯 잘도 읽어셧습니다.

언젠가 엄마께서 :너거 아부지 심청전소설 읽으시면서 얼마나 눈에

눈물을 흘리시던지: 했습니다.

아버지, 

저   아버지께서  술 취한 모습을  한번도  보지를  못 햇습니다.

말씀도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시기에  농담같은  것도 한번  못

들엇답니다  그게  조금은 아쉽습니다.

들논밭에서  일하실적엔  꼭  막걸리 주전자를 갖고 

가셔서 목 마를때면 술주전자 채로 들어서 한모금씩 마시곤 하셨습니다.

천성이  부지런하시어  우리집  벼논,밭에는  잡초하나  볼  수가 없게

언제나 말끔히   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아들하고  20리  떨어진  하빈면 대평리 제 외가를  걸어서  갈 적에

가는길  중간쯤에 있는  하빈  현내동의 아버지의 외가,

제게는 진외가에  들러시어 꼭 저로 하여금 어른께 반드시   인사를 

시키시는 좋은 습관을  길러 주셧습니다.

누군가  말씀하시길 "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가장  큰  유산은 

좋은습관  이라  햇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가슴  따뜻한  추억입니다". 라는  글 

이  아들은  좋은습관, 따뜻한 추억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답니다. 

아버지, 

이 아들  대구  남산동  5촌 백모님집  하숙할때  어머니와 함께 

교대로  힘들게 농사지으신  쌀을   이고,지고 ,오셔서 

제  하숙비를  대신햇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  마지막  이 아들한테  신신당부 하신  그  말씀 

저  평생  잊지않고  되새기겠습니다.

생시에  저 때문에 아버지 마음 속상해 하신것,

그로인해 건강이 더 악화되신것,

한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또 용서받고 싶습니다.

지금같이 의술이 발전하여  그당시에도 이식수술을  할 수만 있었다면 

이 아들은 기꺼이 흔쾌한 마음으로  기증을  하련만

그때는  할 수가 없었읍니다.  단 한번도 못 해드린  효도 

엄마께는  후회없게 다 해  드리겟습니다.

또 초가집 허물고  양옥집 지어서 남은가족들 잘 살게 해놓으시고

그해 추석날 저녁에  오랜 숙환끝에 돌아가신 것 생각하면

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지,  추석쉬고 10여일  뒤면  증손자가  태어 날  예정입니다  

저승에서나마  함께  기뻐 해  주세요 

아버지, 작년 추석 1주일전에  제가 신청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국가유공자증서가 대통령명의로  보내와서 

지금 거실벽에  걸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올봄에 병무청에서 병역명문가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우리집이 바로 적격이라 생각하여 필요서류를 냈습니다.

아버지 아들 손자,3대가 내리 현역복무가 필요조건이라

머지않아 국가로부터 병역명문가증서 가 오면

아버지의 국가유공자증서 와 함께 자손대대로 전하렵니다.

아버지, 

요즘같이 좋은시절  살아계신다면  엄마와 함께 제  개인택시에  

모시고 가고싶은 곳마다 구경다니고 

먹고싶은 음식도 마음껏 대접하고픈데 

지금곁에 안 계시니 넘넘  후회스럽습니다.

이 아들은 부모님 덕분에 지금 부러운것 하나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겨우 쉰네해 사시고  가신

아버지(1926.음 11.9ㅡ1979.음 8.15 추석날)를 생각할때면 

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지,  이 아들 그만 울겠습니다

가끔가다  아버지 생각이 날때면

그 옛날  가슴 따뜻했던 이야기와 추억을 떠 올리렵니다.

아버지  ,이 아들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또 잊지않고 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또, 보고싶습니다.  불초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