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두 번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다산 정약용. 그는 실학의 집대성자요 조선 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힌다. 그는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과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그의 학문 성과는
실은 그 유배생활이 낳은 작품이었다. 기나긴 유배생활이 아니었다면
그같은 몰입과 정진이 불가능했겠기에 하는 말이다.
18년의 유배는 그 자신에겐 고통의 시간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정약용을
정약용이게 만든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정약용 곁을
지킨 여인이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정약용과의 사이에 낳은 홍임
이라는 딸아이 이름을 따서 ‘홍임이 母’라고만 알려진 여인이다.
꼿꼿하고 정갈한 선비, 존경스럽기만 한 대학자 정약용이
꼿꼿하고 정갈한 선비, 존경스럽기만 한 대학자 정약용이
어찌 정실 부인 아닌 여자를 가까이했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백범 김구도 중국에서 도피 시절 뱃사공 처녀와 같이 살며
아들까지 낳았는데, 소실 두는 것을 당연스레 여기던 조선 시대 사람
정약용이 그랬대서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놀랄 일은 오히려 그런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묻혀져 있던 점이다.
묻혀져 있던 ‘홍임이 모’의 존재을 입증해준 건 최근 국문학자 임형택이
묻혀져 있던 ‘홍임이 모’의 존재을 입증해준 건 최근 국문학자 임형택이
발굴한 한 편의 연작시였다. 제목은 <남당사南塘詞>. 지은이는 누군지
알 수 없으나 강진의 문인이라고 짐작된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시 앞에 홍임이 모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몇 줄 안되는 설명이지만 그것으로 ‘홍임이 母’는 구전 야사의
주인공으로부터 실제 인물로 되살아났다.
홍임이 모는 정약용의 유배시절, 소실이었다.
홍임이 모는 정약용의 유배시절, 소실이었다.
친정은 강진 남당.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살았던 10여 년 동안
홍임이 모는 정약용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밥 짓고 빨래하고
드나드는 손님들 맞이하고 철따라 자라는 찻잎을 땄다.
유배가 풀려 정약용이 경기도 마현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홍임이 모는 낭군을 따라나섰다. 딸 홍임이도 함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사연에선지 홍임이 모는 내침을 당했다.
그런데 무슨 사연에선지 홍임이 모는 내침을 당했다.
그리고 친정인 남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녀자 홀로
경기도에서 전라도까지 가야 할 먼 길이 염려되었는지
박씨 성 가진 남자를 붙여 데려다주게 했다. 박씨를 따라 전라도 장성에
이른 홍임이 母를 그곳 명문 집안인 김씨 집 남자가 탐을 내어 범하려 했다.
"내 비록 천한 몸이나 조관朝官을 지낸 분의 첩실이다.
"내 비록 천한 몸이나 조관朝官을 지낸 분의 첩실이다.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홍임이 모는 그길로 정약용과 살던 다산초당으로 갔다.
홍임이 모는 그길로 정약용과 살던 다산초당으로 갔다.
날마다 연못과 정자, 수풀 사이를 서성이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첩이지만 헌신하던 남편에게 버림받고 또 모르는 남자에게
넘보임당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하릴없이 여겨졌을까.
그후 홍임이 모는 다산초당에서 홀로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
"나는 듣고서 몹시 슬프고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나는 듣고서 몹시 슬프고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남당사> 열 여섯 구를 지었다. 이 노래는 한결같이 여인의 마음을
파악해서 표출한 것이요 하나도 부풀린 말은 없다.
읽는 이들은 살피기 바란다."
<남당사>의 지은이는 이렇게 설명을 맺었다.
<남당사>의 지은이는 이렇게 설명을 맺었다.
그리고 자신이 홍임이 모가 되어 시를 써내려갔다.
천고에 빛나는 문장 세상에 특출한 재주 絶代文章間世才
만금을 주고도 한번 만나기 어렵거니 千金一接尙難哉
갈가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寒鴉配鳳元非偶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 菲薄心知過福災
갈가마귀처럼 미천한 몸이 봉황새 같은 정약용을 만난 건
복이 아니라 재앙이라고 홍임이 母는 자탄하고 있다.
어린 아이 총명도 해라 그 아비 닮았는가 幼女聰明乃父如
아빠를 부르고 울먹이며 "언제 와요?" 喚爺啼問?歸歟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해 왔다는데 漢家猶贖蘇通國
무슨 죄라고 이 아이는 유배지에 남아 있나요? 何罪兒今又謫居
정약용은 딸아이를 거두지 않았나 보다.
자신의 신세보다 딸아이의 앞날이 더 걱정이던 홍임이 모는
흉노에게 잡혀 흉노 여인과의 사이에 소통국이란 아들을 낳고
살았던 한나라 사람 소무의 고사를 들먹이며
무심한 부정父情을 원망한다. 소무는 몸값을 바쳐 자식을 거두었다는데
당신은 어찌 침묵만 하냐고. 하지만 원망도 잠깐,
어느새 솟구치는 그리움에 진한 눈물을 흘린다.
고적한 집 홀로 그림자를 끌어안으니 孤館無人抱影眠
등잔 앞 달빛 아래 옛 인연이로다 燈前月下舊因緣
서재며 침실이며 꿈결에 어렴풋이 書樓?閣依?夢
베개 머리에 눈물 흔적만 남았구나 留作啼痕半枕邊
그러다 지친 홍임이 모는 체념과 절망으로 마음을 닫는다.
고적한 집 홀로 그림자를 끌어안으니 孤館無人抱影眠
등잔 앞 달빛 아래 옛 인연이로다 燈前月下舊因緣
서재며 침실이며 꿈결에 어렴풋이 書樓?閣依?夢
베개 머리에 눈물 흔적만 남았구나 留作啼痕半枕邊
그러다 지친 홍임이 모는 체념과 절망으로 마음을 닫는다.
나를 저버린 당신만이 저버린 진짜 이유를 알 거 아니냐고
정색의 물음을 던지며.
남당 노래 여기서 그치나니 南塘歌曲止於斯
이 노래 마디마디 절명의 소리 歌曲聲聲絶命詞
남당의 노래 들어볼 것도 없이 不待南塘歌曲奏
저버린 마음이야 저버린 사람이 잘 알겠지 負心人自負心知
정약용은 떠나보낸 홍임이 모녀에게 어떤 배려를 했을까?
남당 노래 여기서 그치나니 南塘歌曲止於斯
이 노래 마디마디 절명의 소리 歌曲聲聲絶命詞
남당의 노래 들어볼 것도 없이 不待南塘歌曲奏
저버린 마음이야 저버린 사람이 잘 알겠지 負心人自負心知
정약용은 떠나보낸 홍임이 모녀에게 어떤 배려를 했을까?
강진 시절의 제자가 마현으로 찾아왔을 때, 정약용은
"이엉은 새로 했는가? 우물 축대의 돌들은 무너지지 않았는가?
못 속의 잉어 두 마리는 더 자랐는가?" 하고 시시콜콜 물으면서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홍임이 모녀에 대해선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런 일을 입밖에 내는 건 체모에 어긋나서였을까?
아니면 차마 못 물은 걸까?
구전에 따르면, 홍임이 모는 매년 새로 돋는 찻잎을 정성스레 따서
구전에 따르면, 홍임이 모는 매년 새로 돋는 찻잎을 정성스레 따서
차를 만들어 마현으로 보냈단다.
매년 올라오는 차를 본 정약용, 시를 한 수 지었단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에 雁斷魚沈千里外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每年消息一封茶
정약용은 고향집으로 돌아간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에 雁斷魚沈千里外
매년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每年消息一封茶
정약용은 고향집으로 돌아간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정치적 재기의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홍임이 母와의 재회도 영영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약용이 죽은 뒤 홍임이 모는 어찌 되었을까?
초당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떴는지,
홀로 남았을 홍임이는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홍임이 모의 존재는
그러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홍임이 모의 존재는
근 200년의 세월을 넘어 홀연 한편의 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약용에게 정실 아닌 소실이 있었다 해서, 그리고 마흔 살 나이에
정약용에게 정실 아닌 소실이 있었다 해서, 그리고 마흔 살 나이에
시작되어 한두 해도 아닌 20년 가까이 걸린 유배생활 동안 수발든
여인이 있었다 해서, 정약용의 인품과 학문이 빛 바래는 건 전혀 아니다.
위인이라고 무오류의 완벽함으로 치장시킬 필요는 없다.
완벽함으로 치장된 위인은 그 자신을 왜곡시킬 뿐더러
그 그늘에 수많은 인간들을 가두기 마련이다.
그늘에 갇힌 이들을 양지로 끌어낼 때,
위인도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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