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딸 홍임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보게 되면 그 수량이 더할수록 다산에 대하여
몰랐던 내용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곤 한다. 다산은 몇년 전 강진의
사의제와 다산기념관에 갔을 때 그리고 남양주 조암의 다산 유적지에
두 차례 다녀온 이후 그에 관한 책을 보다가 더욱 더 관심이 가기 시작하여
다산 관련 책자를 10권 이상 읽고 지금도 그의 책을 간간히 읽고 있다.
한데 그의 사상이나 학술적인 것은 읽기가 쉽지 않아 그 외 분야의
즉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내용의 책들을 읽고 있다.
이번엔 많은 책을 읽다가 그 기록들 중 극히 일부 비쳤거나 없고
말로만 들린 강진 유배시의 첩 다른 말로 소실과 그의 딸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첩과 딸 이야기는 강진의 사의재에 갔을 때
그 뒤편에 있는 주모상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정약용과 무슨 관계길래 이렇게 주모의 흉상을 만들었을까 하는,
그래서 혹시 다산이 강진에서 지내며 아내 외의 첩을 두고
그 자식까지 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몇가지의 책과
자료를 찾아보니, 그 내용들이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의
남당사16수란 시에서 보게 되어, 그에 관한 내용들을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부분은 인용, 발췌하여 엮어서 일부 생각을 더하여 옮겨보았다.
다산 정약용은 광주 마재의 집에서는 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둘이 있었으나
하나는 어려서 병사하여 다산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다른 하나는 성장하여 출가를 시켰는데 다산은 늘 그 딸을 안스러워 하여
아내가 보내준 치마폭 감에 매조도를 그려 강진에서 마재 집으로 보냈으며,
이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현재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매조도가 있는데 이는 새가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의 아래에는 7언 절구의 시 한 수가 적혀 있어서 보면,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어 나와 꽃을 다 피웠구려.
어데선가 날아온 채색 깃의 작은 새는/
한 마리만 응당 남아 하늘 가를 떠도네.’
이 매조도를 살펴본 정민 한양대 교수는 다산이 강진 유배 중 얻은
소실의 딸 홍임을 위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는 “마르고 썩은 가지에 새싹이 돋아 꽃을 피웠다는 것은
자신이 뜻하지 않게 새 인연을 맺게 된 사정을 암시하고,
어디선가 날아든 작은 새는 그 사이에서 얻은 딸을 뜻하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삶을 바꾼 만남>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적어 놓았다.
다산의 소실에 관련된 내용은 정민 교수의 저서 <삶을 바꾼 만남>
에서 많이 나와있고 한승원의 소설 <정약용-1.2>에는 연둣빛 머리
처녀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인이 사의재의 주막의 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의재에 가면 사의재 뒤편에 주모와 그 딸의 훙상이 있다.
홍임 모녀를 위한 남당사16수에서 나오듯이 홍임의 모친은
남당포 사람이라고 하는데, 남당은 강진만의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마을 포구라 하여 주막집 딸이라는 의견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원래 주막집 모녀의 집이 남당이었는데 생계를
위하여 강진 성문밖으로 이사를 하여 주막을 차렸지는 알 수가 없다.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4-5년 정도 머물러 그 집 딸이라면 어렸다 하여도
그 당시 시집갈 나이의 처녀로 성숙하였을 것이다. 이후 정약용이 거처를
옮기며 이학래의 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산초당으로 가서 시중을 들 하인을
두었으나, 이 하인이 너무나 게을러서 1810년에 내치고, 그 자리를 다산의
제자들이 오가며 시중을 하였으나, 여자의 손이 미치지 않는 주변은
늘 정결치 못하고, 부족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또한 다산은 풍이 들어
힘들었다고 한다. 이 때 윤구노란 사람이 안살림을 맡을 여자를 들이라고
권하였는데, 이때 한양서 들려오는 석방 소식이 그 당시 실권자들의 방해로
인하여 해배의 꿈이 절망으로 치닫는 시기였기에, 다산의 마음도 약해져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인 1812년 경 소실을 들인 것으로 추정을 한다.
이 소실에게서 딸을 두는데 정약용이 해배되어 마재로 올라갈 때 쯤이면,
연령이 5-6세 정도되어 칭얼거릴 나이로 보이며
남당사16 수 안에는 딸의 칭얼대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정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임형택 교수가 남당사16수는 인사동의
문우서림의 김영복 씨에게서 구하였는데, 어떤 잡동사니 책자의 필사본 내에
포함이 되어 있었으며 그 책자 안에는,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빈'도 있다고 한다.
그 책자 표제에 정약용이라고 표시 되어 있으나, 임형택 교수는
정약용은 아닐 것이고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고있다.
임형택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 남당사 16수를 소개하였다.
다산의 소실 홍임모녀는 다산이 해배가 되자 광주 마재의 집까지 따라 갔다.
하지만 다산의 집안에서는 홍임 모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치게 되어
정약용의 아내가 박생이란 자를 붙여 다시 강진으로 보내게 되었다.
강진을 가는 도중, 장성의 부호 김씨가 자신의 소실로 들이려 하였으나
반항하고 빠져 나왔다고 하며, 강진의 자신의 친정 남당포가 아니라,
다산이 머물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당사 16수를 지은이는 정약용인지 아니면 다른 이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홍임모의 이야기를 듣고 슬프고 안타깝게 여겨 남당사 16수를 지었으며,
이 여인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시다 라고 하였다.
정약용이 마재에 가서 18년을 머물다 세상을 떠났는데
강진의 황상을 비롯한 제자들이 마재로 몇 번 올라갔다고 한다.
다산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다섯곳에 18마지기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는데, 다산이 강진을 떠나기 전 제자들과 만나
이 토지를 친목계인 다산계의 소유로 하여 이후 정기적으로 다산에게
이 토지와 관련된 내용도 전한 것 같다,
남당사16수를 정민 교수의 저서 “삶을 바꾼 만남”에서 발췌하여
한시를 한글로 풀은 것을 옮겨 본다.
1수 “남당포 물가가 바로 저의 집인데/
어인일로 귀의하여 다산에 머물렀나/
낭군의 사시던 곳 알아보려 한다면/
연못가에 여태도 손수 심은 꽃 있다네”
2수다 “남당의 아가씨가 뱃노래 잘 불러서/
밤에 강루 올라가 뱃노래 희롱하네/
장사치애 이별을 쉽게 한다 말하지만/
장사치는 그래도 왕래나 자주 하지”
3수다 “갈 생각만 하는 님 내 마음 슬퍼지니/
밤마다 심지향 하늘에 닿았겠네/
어이 알리 온 집안이 환영하던 그날이/
아가씨 집 운명 외려 기구하게 될 때임을”
4수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 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오내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말가”
5수 “정씨 집서 절을 받고 칼로 단비하였건만/
사람시켜 강포하니 우너망 어이 깊잖을까/
어이 알았으리 못된 장난 다시 만나/
양근 박가 돌아올 제 이 마음을 표시할 줄”
6수 “베짜기와 바느질은 관심이 하나 없고/
일 없이 등불 돋워 밤이 하나 깊었구나/
곧장 오경 이르러 닭 울음 그쳐서야/
옷 입은채 벽에 기대 혼다서 신음한다”
7수 “절대의 문장에다 세상 드문 재주시니/
천금 줘도 한번 만남 오히려 어려우리/
갈가마귀 봉황배필 원래 짝이 아니거니/
천한 몸 과한 복이 재알 될 줄 알았다오”
8수 “흙나무의 마음인가 돌 사람이란 말가/
고금을 통틀어서 마침내 짝 없으리/
깨진 거울 둥글게 될 가망이야 없다해도/
그대 집 부자은정 차마 어이 끊을까”
9수 “얼룩 화장 떨군 비녀 남이 볼가 겁이 나니/
웃다가 찡그림을 다만 홀로 안다네/
낭군마음 그래도 다정함 있다하면/
반쪽 침상 이따금 꿈에라도 안올른지”
10수 “물막히고 산도 막혀 기러기도 안 오니/
해 넘도록 관주 편지 받아보질 못했네/
아가씨 이 날에 천만가지 외로움에/
낭군께서 떠나시기 이전의 일만 생각하네”
11수 “석자 칼로 그어서 이 가슴 도려내면/
가슴 속에 또렷하게 남의 모습 보이리라/
이용면의 솜씨로 베껴낸다 하더라도/
정성이 저절로 하늘 솜씨 빼앗으리”
12수 “홍글촌 서쪽에는 월출산이 솟았는데/
산머리의 바위 흡사 오는 사람 기다리듯/
; 몸 만번 죽는대도 남은 한이 있으리니/
원컨대 산머리의 한 조각 될 될래요”
13수 ”엄자산 햇빛마저 그댈 위해 슬퍼하니/
늙기 전에 서로 만나보지 못함 안타깝다/
해와 달을 묶어둘 재주 설령 없다해도/
남은 세월 생이별을 차마 어이 견딜려나“
14수 “외로운 집 사람 없이 그림자 안고 자니/
등불 앞 달빛 아래 옛 인연이로구나/
서루와 침실이 꿈결에 희미하고/
베겟버리 울던 흔적 그대로 남아있네”
15수 “남당의 봄물에 안개가 절로 일고/
물가 버들 강가 꽃이 객선을 덮는구나/
하늘가 곧장 가서 하늘길이 통한다면/
가는 편에 아이 실어 소내에 닿을텐데”
16수 “남당가 노래곡조 여기서 그치리니/
노래 곡조 마디마디 절명의 기사일세/
남당가 곡조를 부르지 않는대도/
마음 등진 사람은 등진 마음 알겠자”
저자 정민 교수는 남당사16 수 한 수 한 수마다 풀이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다산을 저나보낸 홍임 모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그려 놓았다.
이를 보기에는 홍임 모가 직접 남당사16수를 쓴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산의 제자 중 누군가 남당 소실과 아는 이가
있었을테고, 홍임모녀가 지내는 것을 스승의 여자가 지내는 것으로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생활을 하도록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지내는 모습을 보고 또 그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생각을 듣고, 붓을 들어 이 남당사16수를 쓰지 않았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추측을 하여 본다. 꼭 제자가 아니라 하여도
주변의 인물 누군가가 홍임모녀의 생활을 보아왔을테고,
이를 적어 다산에게 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을가 싶다.
다산은 18년만에 집으로 돌아가 그동안 떨어져 살아왔던
조강지처 아내에게는 강진에서의 소실 모녀 즉 홍임모녀의
이야기를 할 처지가 못되었을 것이고, 간간히 올라오는
강진의 제자들에게도 홍임의 소식은 묻지 못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제자들 중 홍임모녀의 소식을 아는 이도 있었을테고,
다산과의 편한대화 때 아마 하지 않았을까 하며,
이를 들은 다산이 직접 이 남당사16수를 쓰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삶을 바꾼 만남>의 저자 정민 교수도 이 뒤의 부분과 비슷하게
정다산이 지은 것으로 표지에 표기를 해 놓았고 ,이는 다산이
직접 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의 인물들을 보면 많이들 아내 외에 여자를 둔 것이 기록
혹은 야화로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이와 같이
홍임의 모인 소실, 퇴계 이황은 단양기생 두향, 율곡 이이는 해주기생 유지
등이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예가 있기는 하다.
선비가 죄를 받아 유배를 떠나서 아내 외에 다른 여인과 만나고
가까이 지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정통한 선비인 다산 정약용은
유배 기간이 길어지며 몸도 몇 가지 병으로 인하여 쇠약하여지고,
마음까지 약해져 이렇게 한 여인을 의지하다가 소실로 두게 된 것 같고,
그에 따라 딸 홍임도 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해배 후 귀향하여
홍임모녀를 불러올렸다가 내침을 당하여 그 후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못한 것은 좀 아쉬운 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 당시 시대의 흐름이
그런 것을 피해 나갈 수 없는 가운데 벌어졌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산의 여인과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남당사 16수외에는
찾기가 힘들지만, 남당사16수를 통하여 다산에게 향한
한 여인의 마음은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 다산을 닮았다고 하는
똑똑하던 딸은 어찌 지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출로 태어났기에
아무리 총명하여도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였을 것 같아도
자신의 처신을, 다산의 핏줄로서 분명히 잘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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