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방

서애와 학봉 (조선일보 만물상 에서 옮겨보다.)

한문역사 2014. 9. 3. 22:06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어떤 임금인가? 물으니 정이주가 먼저 답한다.

:전하는 堯舜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한다.:전하는 요순같은 명군도 될수 있지만 걸주(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자 옆에있던 류성룡이 거든다.: 김성일이 말한것은 .걸주같은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니 전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는 그제서야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합니다.

안동출신 서애와 학봉은 퇴계 이황의 300여 제자중 우뚝한 두 봉우리였다.서애보다 네살 더 많은 학봉은 매사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학자형이고 서애는 화합과 조정능력이 탁월한 정치가엿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학봉을 탄핵하자는 여론이다  그가 단지 일본의 침략을 낮게 보앗다는 지적이다.서애는 징비록에서 :학봉역시 전란조짐을 간파하고 있었다: 고 변호한다.같은 스승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死後 세상은 둘을 갈라놓았다.1620년 퇴계를 모시는 호계서원에 제자들도 함께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학봉과 서애중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 가 문제엿다.서애쪽은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가 앞서야된다고 주장하고 학봉쪽을 나이로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이 앞서야한다고 주장한다.오랜 우여골적 끝에 서애의 위패는 병산서원 ,                            학봉의 위패는         임천서원   ,

스승인 퇴계는 도산서원에 모시게된다.1805년 서울 문묘에 서애와 학봉을 모시러 할때도 양쪽에서 서로 서열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아예 없었던 일로 한 것이다.올해안에 착수할 호계서원 복원을 계기로 학봉의  의성김씨 문중과 서애의 풍산류씨 문중이 위패서열에 합의했단다.

퇴계선생 왼편에는 서애를 ,오른편에 학봉을 모신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400년만에 화해를 해서 조상들을 더욱 더빛나게 할 것이다.....

  

참고로 학봉 김성일은 (1538ㅡ1593)1568년 선조1년에 문과급제를 하고 1590년 조선통신사 副使로 正使 황윤길과 동행  1591년 귀국 1592년 왜란때 경상右道 초유사와 1593년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잇다가 1593년에 병사하신 분입니 시호는 문충(文忠)이네요. 

서애 류성룡은 (1542ㅡ1607 )1566년 에 문과급제하고 임진왜란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 하시고 시호는 文忠입니다.   서애의 외가가 의성 사촌리 라 바로 의성김씨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