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한 글 ,문장

어머니 영전에 올림(이규형님:퇴계학 부산연구원 이사장 .수필가)2015.1.19.

한문역사 2015. 1. 19. 21:40

임오년 사월 초파일(2002년 5월19일) 향년 89세로 유명을 달리하신

 어머님께 엎드려 이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를 뵙지못한지가 어느새 1년이 되엇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계시옵니까?

우리집 구석구석 어머니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고 ,

어머니가 쓰시던 방은  텅 비어 있으며 ,

어머니가 가꾸시던 화초들은 분갈이를 기다리며

금년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

 

아들, 며느리, 손자,손부, 손서, 증손들, 모두 잘 있습니다.

준희 태훈이가 보고싶지 않으십니까?

작은  아들 일형이 잘 살고 있는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소자는 지금도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어디서 오실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곤 합니다.

어머니!우리는 영영 만날 수 없는 것입니까 .오호 애재라.

 

어머니! 小子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일곱살에 상주되어

 3년상을 내면서 초하루 보름 삭망에 아침저녁 상식 올리는것을

 왜 모르겠습니까.1년상도 알고 100일 탈상도 알고 49재도 알고 있으면서

3일만에 매혼을 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래도 어머니 유택을 어머니가 원하시던 우리 밤 산으로 모시고

작은 아들집이 가까이 있어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어머니 께서는 성주이씨 매설당 휘 조년의 후손 휘 태원의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셔서 열아홉 되던해의 순박한 규수가

우리 가문으로 시집을 오셨지요

.시집오신 다음해에 소자를 낳으시고 경사가 낫다고 慶生이라 이름짓고 ,

동생이 태어나자 경사가 겹쳤다고 益生이라 이름지어 

경생이와 익생이를 보물처럼 품에안고

젖주고, 물주고, 밥주고, 옷주고, 사랑을 주셧습니다. 

 

그것도 잠깐 이 무슨 청천벽력 입니까.

경생이 일곱살, 익생이 두살,어머니 연세 스물 일곱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어머니 모시고 어린자식 둘을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앞이 캄캄 하셨지요

 지금 같으면 시집도 안 갔을 꽃다운 나이에 청상이 되어 수절하셨으니

기나긴 세월 그 젊음의 고통을 어떻게 참아 내셨습니까?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일제日帝는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로

 압박과 착취가 극極에 달했으며 대대로 이어오던 명문가의 전통도 다 무너지고

사람가고 살림간다 는 옛말처럼 가산도 몰락하였지요

가난과 멸시속에 온갖 수모 다 겪으시며 오직 아들 둘 잘 키워서

 영화를 누리시겠다고 그 많은 세월 얼마나 고생 하셨습니까. 

 

어머니, 우리 어머니!어머니는 맹자의 어머니, 율곡의 어머니, 한석봉의 어머니,

그 누구의 어머니 보다 더 壯하고 훌륭한 어머니 중의 어머니십니다.   

 어머니, 옛성현의 말씀에 樹欲靜而風不止,子欲養而親不待,

즉 나무는 고요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냥 두지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고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인들 부모가 소중하지 않으리오만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자식 위해 쏟은정성

무엇에다 비유하며 반포지효反哺之孝다하지 못한 죄를 어떻게 하오리까.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는 평생을 함께 살면서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때로는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점 이렇게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 우리가 살던 죽동마을 대밭 골목 옛집은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와 중문채로  된 대갓집 사대부가의 모양을 갖추고 잇엇지요 .

어찌된 영문인지 몇 년 사이에 집도 팔고 밭도 팔고, 소도팔고,

금천마을 남의 오두막집으로 이사하여 가난하게 사셨지요.   

그 무렵 소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못 한채

혈혈단신 사고무친 四顧無親 부산으로 내려와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야간중학 다닐적에

소자가 보낸 눈물젖은 편지받고 많이도 우셨지요. 

   

1953년 소자 고등학교 1학년때 부산으로 이사와서

서대신동 제일교회 담벼락에 판자집 짓고

방 한칸, 점포 한칸, 구멍가게 하시면서 먹고 살기 바쁜중에

아들 둘 학비 조달 하시느라 만첩고생 하셨지요 . 

소자가 대학진학할때 등록금을 마련못해

종질부, 생질녀, 조카집으로 구걸하러 다니셨던 일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한恨많은 세상을 사셨지만

少時적에는 좀 작은키에 예쁘시고 매사에 당차시고 지혜로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소자가 직장을 얻고부터

가세가 조금씩 나아져서 좌천동 언덕에 새집지어 이사하고 ,

범내골 로터리에서 숙박업 하실적에 알뜰히도 하셨지요.  

 

 고향땅 동화마을에 밤 산 사서 농막짓고 ,

마을일꾼 20-30명  상시로 불러다가 철따라 퇴비하고 ,

풀베고, 약치고, 밤 딸 적에 그 넓은 밤 산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고 내리시며 ,관리 감독 하실적에

고생인지 보람인지, 억척같이 하셧지요.  

 

 그렇게도 정정 하시던 어머님이 이제 그 산 제일 좋은 자리에 누워 계십니다.   

 연세가 높아질수록 입맛도 떨어지시고 기력도 쇠잔하시어

70된 아들이 90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치과로,안과로,

이비인후과로, 내과로, 한방으로 다녔지만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이야 . 

몇년은 더 사실 줄로 믿고 있었는데

예방이 잘못되고 효성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원통합니다. 

 

어머니, 재작년 생신날에 88세 米壽잔치 거창하게 치르려고

 해운대 그랜드호텔에 예약까지 해 둔것을 어머니께서 

동아대학 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으로 큰손부가 해약하고

계약금 받아온 것 알고 계셨지요,

 

동래별장에서 가까운 친족끼리 치른 생신잔치,

것이 끝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머니의 존재는 나의 가슴속에 변함없는 신앙입니다.   

 가끔 길을 가다 生時 어머니의 모습과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를 만나면

 어머니를 뵈옵는 착각으로 깜짝 놀라곤 합니다.  

    

 오호 통재라 ! 어머니, 근재 어미 결혼 후 70평생 이날까지 시집살이 하면서

적지않은 손님 접빈, 4대봉제사 모시면서,

그 많은 집안살림 소리없이 다 치르고 고생한 것 아시지요 .

살아생전 잘못일랑 다 벗어 던지시고 하해河海같은 자애慈愛로써 용서하여 주십시요.

 

호주사는 金室이 수만리 먼 길에도 초상 장사 참석하고 기도로써 보은하며

,전室이 내외도 아이들 성실하고 유치원 잘 하고 있습니다.

 근재내외 준희와 승헌내외 태훈이도 무탈하게 지냅니다.

어머니 작은아들 노래소리 듣고싶지 않습니까.  

 의젓한 성호모습 보고싶지 않으십니까.  

  

어머니 께서는 아버지 여의시고 60년을 소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 60년은 자상한 어머니로서, 엄격한 선생님으로서,

 생활의 동반자로서, 말년에는 소자를 의지하고 사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강인하시고 총명하시고, 지혜로우셨습니다.

그 인내력과 강인성 ,그 총명하심과 지혜로움을 소자에게 다 전수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집의 기둥이셨고 ,業이셨습니다.

소자의 지난 세월 돌아보면 어려운 고비마다 어머니가 계셨기에

,어머니의 뜻에 따랐기에 소자의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동화마을 밤 산 살때 어머니가 :사라:고 하셨지요.

 일형이 살림날때 :집을 사서 내 보내라: 고 하셨지요

.일형이 밤 산 밑 강가에 가든집을 짓고 빚때문에 허덕일때 :

하나밖에 없는 동생 내 앞에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고 하신 말씀 뼈에 사무칩니다. 

밀양 산외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을때도

:다른 감투 다 버리더라도 그것만은 하라: 고 하셧습니다.

망해서 떠나온 고향에 대한 한恨과 응어리가 지금까지 남아 잇었습니까?

 

어머니, 소자는 제 방에 어머니의 큰 사진을 걸어두고

아침저녁 심상心喪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남겨두신 사진첩을 다시 정리하여

:사진으로 보는 할머니 일대기: 라 이름붙이고 가보로써 보존하고 잇습니다.

가족들과 찍은사진 ,설 명절에 찍은사진, 밤 산에서 찍은사진,

노인대학 졸업사진,제주에서 설악까지 전국방방곡곡 관광가서 찍은사진,

동남아여행사진, 어머니의 자서전같이 중년이후 역사가 이 책에 다 담겨 잇습니다.

 

어머니 회갑잔치때 그 많은 친구분들 다 모셔놓고

친구분은 신랑하고 어머니는 신부해서 연지곤지 바르시고 금혼식 올린장면 ,

기생 악사 불러놓고 노래하고 춤도추며 ,

대소가와 일가친척 연비척당 다 모여서 큰 상 차려놓고 

手下들이 절 올리며 여생영화 餘生榮華 만수무강 축수祝壽하는 모습이며 ,

어머니의 지난세월 역력히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식목일에는 어머니 묘소에 분재 소나무 2그루,

 백일홍5그루 , 매화, 모과나무 그리고 철쭉을 심었습니다.

 내년에도 심고 내후년에도 심어서 산소주위를 꽃동산으로 만들어

손자 증손 데리고 무시로 방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생시의 간절하신 뜻을 새겨

산소앞에 자연석으로 묘비명을 세우려고 합니다. 

 

어머니, 사람이 환생還生을 한다면

소자는 어머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못 다한 孝를 다하고 싶습니다. 

오호 애재라!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 어디인지 저희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울산에 잇는 암자에 불상을 헌정하셧으며

,송정 혜광사에서 豫修祭 드리시고 꽃가마도 타셨습니다.

그리고 사월초파일 세상을 떠나셧습니다.

 

부처님이 보살펴서 극락으로 가셧는지,

아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 천당으로 가셨는지,

 소자는 분명히 하늘나라 좋은 곳에 선녀처럼 계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송강 정철의 시조가 생각납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랑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어머니, 소자가 찾아가서 뵈올 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2003년 음 4월 8일 

                                                                          불효자  규형  삼가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