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 이이가 유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유지에게 써준 서간. 자신과 유지의 관계에 대한 전말과 유지에 대한 감정 등을 담고 있는데 ‘유지사(柳枝詞)’라 불린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제공> |
‘아득한 들판에 달은 어둡고/ 빈숲에는 범 우는 소리 들리네/ 나를 뒤따라 온 뜻 무엇인가 물으니/ 예전의 어진 말씀 그리워서라 하네//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야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율곡(栗谷) 이이(1536~1584)가 기생 유지(柳枝)에게 써준 글 중 시의 일부다. 이이의 애틋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선생은 언제나 여색(女色)을 멀리했다. 일찍이 누님을 뵈러 황주(黃州)에 갔는데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 곧 촛불을 켜놓고 거절했다. 함께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이 글은 이이의 수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이 쓴 것이다. 여기서 ‘선생’은 이이를 지칭하고, 기생은 유지를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인가. 27세 연상의 이이와 유지의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다. 육체적인 관계를 떠난 이성 간의 인간적이고 정신적 사랑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사랑 이야기다.
◆12세 소녀와 39세 대학자의 만남
이이가 유지를 처음 만났을 때 유지의 나이는 열두 살 소녀였다. 이이의 나이는 39세였다. 건강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력이 왕성할 때이기도 했다. 도학자로서 심신 수양에 매진하던 장년기였다.
황해도 관찰사 부임 39세 李珥
12세 童妓 유지와 첫번째 만남
칭찬·격려하며 삶의 가르침 줘
9년 후 해주 관아에서 묵던 중
하룻밤 모시려던 유지 또 거절
병환으로 별세 전 마지막 만남
밤새 진심 나누며 ‘柳枝詞’ 써
이이는 1574년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 받고 임지인 해주 관아에 도착했다.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가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이는 몸이 약해져 임금이 관직을 내려도 여러 차례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조정은 그래도 그의 학식과 품성을 높게 사서 중요한 관직을 제수하여 맡기고자 했다. 그래서 이이가 약해진 몸을 요양하려고 황해도 해주에 있는 처가나 황주에 있는 누님 집으로 자주 간다는 것을 알고, 관찰사를 하며 요양을 같이 하라는 뜻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이이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이가 해주 관아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상을 받는데 어린 기생인 동기(童妓)가 따라 들어왔다. 그 동기는 이름이 유지이고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이의 나이는 39세였으니 몇째 딸 정도의 나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이는 그래서 총명하고 예쁜 유지를 귀여워했으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술시중은 하게 하였으나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을 뿐이었다.
유지는 이이에게 자신의 부친은 선비이고 모친은 양갓집 여인이었으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이는 이런 유지를 따뜻하게 대하며 칭찬과 격려의 말과 함께 삶에 필요한 가르침들을 주곤 했다.
얼마 후 이이는 임기가 끝나 한양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유지는 이이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이의 각별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한 유지는 언젠가는 이이를 다시 모실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9년 후의 재회
세월이 흘러 9년이 지난 후 이이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둔 임시 관직)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해주 관아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밤에 율곡의 침소로 유지가 찾아왔다. 그동안 유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숙했고, 적당하게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연모의 마음을 간직하며 기다려온 유지는 이날 밤 이이를 모시려 했으나 이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지는 더욱더 이이를 존경하며 연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기약 없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해가 바뀌어 이이는 요양을 하러 황주 누님 집을 가는 길에 유지가 보고 싶어 해주에 들렀다. 유지를 다시 만나 같이 술을 나누며 회포를 푼 이이는 황주로 갔다가 돌아와 해주 근처 강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황해도 재령 부근에 있는, 강이 흐르는 밤고지(재령 고을에서 60리 북쪽에 있는 율관진을 말함)마을이었다.
이곳에 유지가 밤중에 찾아갔다. 이이가 병환으로 별세하기 3개월여 전인 1583년 9월28일 밤의 일이다.
당시 이이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던 이이는 황주의 누님 집에 요양하러 간 것이다.
그 곳에 유지가 한밤중에 이이를 찾아온 것이다. 유지는 이이를 보니 얼마 안 있으면 별세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이는 병들어 기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이는 이날 밤 유지와 밤새도록 진심을 나누는 각별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 이이는 당시의 상황과 유지에 대한 마음을 담은 글과 시를 지어 유지에게 주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이이가 유지에게 써준 글과 시다. 제목은 따로 없고 ‘유지사(柳枝詞)’라 불린다. 이 유지사는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 내용이다.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몰락해 황강(黃岡·현재의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있었다. 1574년 내가 황해도 감사(관찰사)로 갔을 적에 동기(童妓)로 내 시중을 들었다. 섬세하고 용모가 빼어난 데다 총명해서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기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욕의 뜻은 품지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원접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 유지는 매양 마을에 있었지만, 하루도 서로 가까이 보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동안 술잔을 같이 들었다. 해주로 돌아올 적에는 절(蕭寺)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그러곤 이별한 뒤 내가 밤고지(栗串)라는 강마을에서 묵고 있는데, 밤중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드리기에 보니 유지였다. 방긋 웃고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이야 온 국민이 모두 다 흠모하는 바인데, 하물며 명색이 기생인 계집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에 이렇게 감히 멀리까지 온 것이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뜬 사내들의 다정이나 사랑하는 것이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았으랴. 더욱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했다고 하니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로다.
안타까워라! 이런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더구나 지나는 이들이 내가 혹시 잠자리를 같이 하지나 않았나 의심하며 저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國中一色)이 더욱 애석하겠구나. 그래서 노래로 읊고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도록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