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867

정다산 자찬묘지명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자신의 묘지명(墓誌銘).접기/펼치기내용유배에서 돌아온지 4년 뒤 회갑때 지나온 파란의 삶을 회고하며 지었다. 무덤에 넣는 소략한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실을 상세한 집중본(集中本) 두 가지가 있다. 집중본을 중심으로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 이란 뜻에서 지었다. 어려서 영특해 문자를 알았고, 10세때부터 과예(科藝)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집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경사(經史)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15세에 서울에서 이익(李瀷) 선생의 글을 ..

정 다산의 南塘詞

홍임 모녀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담다다산초당 살림 도운 여성 만나50중반 늘그막에 얻은 딸 위해‘새 한마리’ 매조도 따로 그려홍임모녀 마재까지 따라왔다가쫓겨나 다산초당 돌아간 사연남당사 16수에 고스란히 실려 다산이 남긴 또다른 매조도다산 정약용의 매조도는 두 개가 있다.하나는 매화나무 가지에 새가 두 마리 앉아 있는 것이며,다른 하나엔 한 마리만 있다. 이에 앞의 것을 매화쌍조도,뒤의 것을 매화독조도라고 부르기도 한다.시집간 딸을 위해 그린 매화쌍조도는 오래전부터 유명하고,사위인 윤씨 집안에서 고려대 박물관으로 넘어간 작품의유통 경로도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이 갖고 있는 매화독조도는2009년 6월 서울 공화랑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매화쌍조도와 구도가 비슷하고, 크기는 똑같다.“묵은 가지 다 썩..

실내에서 하는 운동법(KBS 1 TV)

1. 바로 누워서 두 손 깍지 끼고 몸을 좌,우로 돌려준다                                                    (척추신장 운동)2. 누워서 발 뒤꿈치는 고정하고, 허리들기 운동한다.3.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개고 두 손과 두 발은              교차하면서 좌,우로 움직인다.4.두 팔을 위로 들면서 발 뒷꿈치를 위로 들고,함께  내린다.5.바로 서서 상체는 고정하고 제기차는 모습으로             반대편 손으로 발 앞부분을 털기한다. 6.두 손을  깍지끼고 위로 올려서 좌,우로 몸을 움직여준다                                                          (취침전 가벼운 운동용)                   ..

건강상식방 2024.08.01

은진 송씨 여인에게 효를 묻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孝효를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가치이자, 德덕의 근본으로 여겨왔다.이 효 사상은 전통 미풍양속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우리의 삶 속에 녹아  그 맥이 이어져 왔다.그러나 오늘날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과 핵가족화로효의 개념은 허물어지고 이를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나는 등 효 사상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이로 인하여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황폐는 치유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으며 효가 무너진 자리에 전통은 매몰되고 퇴폐풍조가 만연하고 있다.이것이 우리의 민낯이다.이러한 각박한 세태 속에서도 7년의 긴 세월을 치매에 걸린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한 이가 있다.그 주인공은은진 송씨 일가의 송 희자(69세 서울)  여사이다.그 녀가 10세 때에 아버지는 2녀 1남을 남겨둔 채 지병으로이 세상과 ..

김호연재

첫째, 이 연구는 17세기 김성달(1642-1696, 자 伯謙, 호 靑洲)과 이옥재(1643-1691) 부부가 혼인 생활을 통하여 생산해 낸 부부수창 한시작품 248수의 내용을 분석하여,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서 이 부부가 이루어낸 부부수창시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김성달 부부와 자녀는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이른바 ‘전 가족이 문인’이었던 ‘가족문학사’를 선구적으로 이끌어 낸 집안이다. 󰡔안동세고󰡕 소재 한시는 모두 부부가 수창하거나 동일 주제를 놓고 함께 읊은 시, 그리고 아내 사후 김성달이 아내를 그리며 읊은 시들이다. 전통시대 한 남성이 아내에게 주거나 아내를 대상으로 읊은 시로는 명실 공히 최대의 작품량이고, 학계에 잘 ..

카테고리 없음 2024.07.27

호연재 글, 발굴한 문희순교수의 바램이야기

갈산면 와리 김성달 가의 ‘살아있는 가족문학사’ 연구 문희순 교수“생가 터에 가족 시비(詩碑) 건립해주길”  문희순(49) 충남대학교 외래교수는 뜨겁다.단 1분이라도 아껴 이들의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말겠다고각오한 사람처럼 강의 내내 들뜨고 흥분했다.문 교수가 이처럼 들뜨고 흥분해 들려주고 싶은 이들은 과연 누굴까.‘홍성의 역사와 문화 강좌’에서 문 교수는 이들 부부와 그 자녀들의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홍성 아니 홍주의 역사 속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모자랄 정도로문학사의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바로 김성달·이옥재 부부와그들의 자녀들이다. 갈산면 오두리 342번지는 바로 안동김씨(갈뫼김씨라고도 함) 김성달 가족의 사랑과 꿈이 서린 곳이다.그들 가족은 부부와 부실 울산 이씨, 13명의 자녀 모두..

카테고리 없음 2024.07.27

김성달, 이옥재,부부의 안동세고

홍성 출신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안동세고(安東世稿)』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는, 조선 후기 부부시인으로 유명한 김성달·이옥재 부부가 살았던 마을이다. 오두리(鼇頭里)는 마을 모습이 자라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서산 A·B 지구 방조제 조성으로 인해 마을 앞이 육지로 변했다. 하지만 옛 시절에는 마을 턱밑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서해 천수만의 아름다운 어촌이었다.김성달(金盛達, 1642~1696) 집안이 오두리에 정착한 것은, 안동김씨 선조인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 1584~1647) 때부터다. 김광현은 병자호란 때 아버지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1637년 1월), 삼년상을 마치고 홍성 갈산 오두리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김광현의 손자 김성달은 서울에서 태어나 과거에도 ..

카테고리 없음 2024.07.27

김호연재

김성달 가족문학사’ 기념하는 가족시비 건립 필요하다  첫 번째 기고 글에서 ‘홍성 문화예술인물’ 선양 또는 기념사업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먼저 문학 분야에서 김성달 가의 가족문학사를 소개하고, ‘선양 또는 기념사업의 방향은 어찌해야 할지, 어떤 것이 있을까’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조선후기 문학평론가 이규경은 《시가점등》 ‘내가수증연주록’에서 김성달·이옥재 부부, 부실 울산 이씨와 열 명의 자녀 등 전 가족의 가족문학사를 논하면서, “책에 수록된 규방에서 읊은 시는, 압록강 동쪽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이 가족의 놀라운 문학적 기량과 시의 경지를 평가했다. 이 집안의 문학사는 한마디로 “압록강 동쪽 우리나라 고금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 김성달 가족과 후손들..

카테고리 없음 2024.07.27

김호연재

조선의 여성 문인, 김호연재(金浩然齋)의 유고시집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여성문인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 바닷가다. 지금은 마을 주변이 육지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바닷물이 출렁이던 아름다운 어촌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 열여덟 살 때 대전 송촌(宋村)의 은진 송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호연재(浩然齋)는 이름이 아니고 호(號)다. 이처럼 이름이 아니고 호가 알려진 데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17세기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이 불려 지지 않았으며, 결혼을 하면 누구의 배(配, 부인)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양반가의 여성들은 자신이 거처하던 안채의 당호를 자신의..

카테고리 없음 202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