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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耳目口心書(이목구심서)-이덕무(李德懋, 1741~1793)

한문역사 2018. 4. 20. 22:23

 

- 백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2016년 1월 21일 (목)
묵은해를 보내며

친정에 간 여린 아내는
새해에 남몰래 눈물 떨구겠지
슬픈 것은 땅에 묻은 딸
살았다면 네 살이구나

弱妻親庭去
逢年暗垂淚
所嗟地中女
生存卽四歲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48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1」
          


  새해가 다가오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을 많이 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왔다 가지만, 보내고 맞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며 온갖 모임을 만들어 술을 양껏 마시다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고, 혼자 조용히 지난 한 해를 반성해 보기도 한다. 과연 얼마나 지켜질지 의심스러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에 조급해하기도 한다.

  이덕무도 나름의 방식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위의 시는 원래 1764년 섣달그믐에 한 해를 정리하며 쓴 연작시 「세시 잡영(歲時雜詠)」 중의 한 수이다. 이덕무는 딱 1년 뒤인 1765년 섣달그믐에 이 시를 다시 떠올려서 『이목구심서』라는 책에 기록하고, 그 일 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짧게 덧붙여 두었다.

  금년에 아들 중구(重駒)가 태어났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 죽은 딸 생각은 조금 덜하게 됐지만, 시어머니께 손자를 안아보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아이의 이마에 눈물을 떨구었다.[今年子重駒生 爲駒也母者 以抱駒也 故於地中 思少減 只齎恨于不使阿姑抱男孫 故淚墜于駒也額髮也]

  같은 날 쓴 다른 시들도 함께 기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슬픈 일들이다.
     풍속에 따라 새해 덕담을 하고              吉語任俗爲
     만나는 사람들 웃으며 복을 기원한다     笑顔逢人祝
     소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小子何所願
     어머님 폐병이 낫는 것이지                  慈母肺病釋

  이 시를 기록하고 이어서 “슬픈 마음이 들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한데, 황홀하게 사방을 돌아보아도 기침하시는 어머니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다.[悲思而靜聽 則吾母之咳喘 隱隱尙在于耳也 怳惚而四瞻 則咳喘之吾母 影亦不可覿矣]”라고 썼다. 시를 지었을 당시에는 아직 살아계셨던 어머니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딸이 두 살 되던 해에 떠나보내고 오랜 슬픔에 잠겨 있던 아내는 올해 태어난 아들 덕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지만,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에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이덕무는 계속해서 작년에 함께 새해맞이를 준비했던 식구들이 이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이야기, 갑작스레 아내를 잃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떠난 친구 이야기 등을 1년 전에 쓴 시와 함께 하나하나 써내려간다. 담담한 서술이지만, 먹먹한 슬픔이 배어 나온다. 이덕무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기록들을 남긴 것일까? 이어지는 글에서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아쉬워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끝이 없다. 이는 마치 정든 벗과 멀리 이별할 때에 사랑하는 마음에 헤어지기 어려운 것과 같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그 사람의 수염ㆍ눈썹ㆍ정신ㆍ노랫소리ㆍ웃고 꾸짖는 모습ㆍ짐을 꾸린 모습ㆍ걸음걸이를 자세히 살핀다. 혹 이 뒤에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면 그 모습을 어느새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除日 有無限戀惜意 正如遠別情朋 愛而難離 當別期則細審其人之鬚眉精神歌音笑罵裝束步趨。以其或此後不逢 則樣子居然忘了故也]

  지난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을 되새기고, 기억을 온전히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것, 이것이 이덕무가 ‘송구영신’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가슴 아픈 일도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고 애써 기억에 새긴 것이다.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려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지만, 나쁜 기억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괴롭다고 해서 피하려고만 한다면 기억은 언젠가 다시 돌아와 발목을 잡는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기억은 족쇄가 아닌 든든한 발판이 된다. 좋은 새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묵은해를 잘 떠나보내야 한다. 다시 못 올 시간을 찬찬히 살펴 기억에 새기는 것, 묵은해를 배웅하는 최고의 작별인사가 아닐까.

 

글쓴이 :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蒙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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