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의 ‘선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율곡의 제자이자 사돈이기도 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다. 글은 「율곡이선생가장(栗谷李先生家狀)」의 일부이고 김장생의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에 실려 있다. 율곡은 적실(嫡室)에선 아들이 없었고 두 첩실(妾室)에서 아들 둘, 딸 하나를 얻었는데 그 딸이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첩실이 되었다.
참고로, 선생의 부인 노씨(盧氏)는 딸 하나를 낳았을 뿐인데 그 딸이 요절(夭折)했다. “무후(無後)”, 즉 ‘후손 없음’이 가장 큰 불효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율곡도 하는 수 없이 첩을 들였는데 첩 또한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다. 부득이 또 첩을 들였고 그 첩이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그 뒤에 첫 첩도 아들을 낳았고 두 번째 첩이 또 딸 하나를 더 낳았다. 이래서 서출(庶出)이긴 하지만 2남 1녀의 자식을 얻은 것이다.
사계의 이 기록은 후인들의 흥미를 끈다. 율곡의 처소를 밤에 찾아온 기생도 범상하지 않고 율곡의 처신 역시 범상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말이 옆으로 새지만, 필자가 율곡을 존앙해 마지않는 것은 그의 성리학(性理學)이나 경장(更張) 사상때문이 아니다.
그의 이기이원적일원론(理氣二元的一元論)이나 퇴계의 이기일원적이원론(理氣一元的二元論)은 끝내 정답이 없는 논의일 수 있고 경장 사상은 그와 비견(比肩)할 사람이 한두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름 아니라 그의 효성과 우애를 존모해 마지않는다. 16세에 모친상을 26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니, 친부모에게 효성을 바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율곡은 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계모를, 어쩌면 어머니 사망의 원인 제공자였을 수도,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게 한 동기를 제공했을 수도 있는 계모를 삶이 다할 때까지 극진히 모셨다.
4남 3녀의 셋째 아들이었던 율곡은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녹봉(祿俸)을 받았으므로 일찍 죽은 큰형의 식구들을 다 먹여 살렸고 가끔 돈 문제로 사고를 치는(?) 둘째 형의 뒷수습을 도맡았으며 어린 아우의 학비도 전담했다. 그래서 늘 가난했고 요즘으로 치면 현직 장관으로 죽으면서도 서울에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대사동(大寺洞 : 오늘의 인사동) 셋집에서 세상과 영결했던 것이다. 네 것 내 것 없는 형제애! 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설하고, “일찍이 누님을 뵈러 황주(黃州)에 갔었는데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사연이었을까? 때는 율곡이 48세이던 1583년 가을이었고 율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향(妻鄕)이자 자기의 집이 있는 황해도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있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찬성(右贊成)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지만 임금 선조(宣祖)와 끝내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해 있던 차였다. 율곡에게 두 명의 누님이 있었는데 이때 황주에 살던 누님은 누구이며 무슨 일로 누님을 찾아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간 율곡은 죽기 서너 달 전에 황주로 갔다가 “나라 안 최고 미녀〔국중일색(國中一色)〕”인 황주 기생을 만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지(柳枝)’였다. 그런데 율곡은 유지와의 조우를 계기로 자신과 유지의 사연을 직접 적어 남겼다. 이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한두 마디를 덧붙인 율곡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유지(柳枝)는 선비의 딸인데,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전락해 있었다. 내가 39세이던 1574년에 황해도 감사로 갔을 때 동기(童妓)였던 그녀가 시중을 들었다. 몸이 날씬하였고 곱게 단장하였으며, 얼굴은 빼어나고 머리는 총명했다.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겼지만, 처음부터 정욕(情慾)의 뜻을 품지는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평안도를 왕래하였는데, 유지는 매번 방 안에서 수청을 들었으나 한 번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내가 48세이던 1583년 가을에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께 문안을 갔을 때 다시 유지를 만났고 유지와 함께 여러 날 술을 마셨다. 다시 해주로 돌아올 때 유지는 연도의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유지와 헤어진 날 나는 밤고지〔栗串〕강마을 주막에서 묵었다. 한밤중에 누군가 사립문을 두들겨서 나가보니, 바로 유지였다. 유지가 방긋 웃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은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사모하는 바이옵거늘, 하물며 기생된 계집이겠습니까?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가시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려워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것이옵니다.’ 마침내 불을 밝히고 밤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단지 방탕한 사내들의 다정(多情)함만을 사랑하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기생이 있는 줄 알겠는가?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탄복을 하니, 이것은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안타까워라, 유지여! 천한 몸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구나. 또한 지나가는 과객들이 내가 혹 잠자리를 갖지 않았나 의심하여 너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國中一色)에게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지어 정(情)에서 발하되 예의(禮義)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이 점을 잘 알 것이다.…
유지와 율곡은 이미 율곡이 1574년에 황해도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만난 사이였다. 이후 전말(顚末)을 율곡 자신이 잘 말해 놓았으니 토를 달면 군더더기일 것이지만, 두 사람은 수령과 관기의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두 사람에게 이미 애정이 있었고, 보통 애정도 아니었다. 몸을 빌리지 않고 내면의 공감으로 승화시킨 감정이었다.
율곡은 유지의 어린 나이를 동정하면서도 그녀의 행실을 사랑하였고 유지는 율곡의 도의를 존경하며 사랑하였다. 사계의 기록에서 밤에 율곡의 처소로 찾아간 유지가 율곡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 별난 기생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지는 율곡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이 조우가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다시 밤에 찾아간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담소한 이튿날 아침, 영결(永訣)이 되고만 이별을 할 때 율곡은 그녀에게 장시(長詩) 한 편과 칠언절구(七言絶句) 3수를 지어준다. 이 시편(詩篇)을 적은 두루말이 원고를 「유지사(柳枝詞)」라 부르는데 원본이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있다. 너무나 절절한 「유지사(柳枝詞)」, 한 치도 숨김없이 사연을 서술하고 관련 직정(直情)과 별리(別離)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노래한다. 원시(原詩)와 필자의 서툰 번역을 아래에 실어본다.
若有人兮海之西, 여기 사람 있네, 황해도 땅에,
鍾淑氣兮禀仙姿. 맑은 기운 모아 선녀 같아라.
綽約兮意態, 그 마음 그 모습 곱기도 하고,
瑩婉兮色辭. 그 얼굴 그 목소리 맑고도 예뻐.
金莖兮沆瀣, 금 쟁반에 받아 놓은 이슬 같은 이,
胡爲委乎路傍. 어쩌다가 길가에 버려졌는가.
春半兮花綻, 봄이 한창이라 꽃도 흐드러졌는데,
不薦金屋兮哀此國香! 황금 집에서 귀하게 살지 못하다니, 슬프다 미인!
昔相見兮未開, 그 옛날 만났을 땐 피지 않은 꽃,
情脈脈兮相通. 말없이 마음만은 서로 통했네.
靑鳥去兮蹇脩, 좋은 중매쟁이 가고 없음에,
遠計參差兮墜空. 먼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展轉兮愆期, 이럭저럭 좋은 때 다 놓쳤으니,
解佩兮何時. 어느 때나 좋은 임 만나게 될꼬.
日黃昏兮邂逅, 날 저물어 우연히 다시 만나니,
宛平昔之容儀. 옛 모습 완연히 그대로 있네.
曾日月兮幾何,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던가,
悵綠葉兮成陰. 푸른 잎 그늘진 거 슬프다 슬퍼.
矧余衰兮開閤, 나 하물며 쇠약해 색을 멀리해야 하고,
對六塵兮灰心. 온갖 욕정 재같이 식어버렸네.
彼姝子兮婉孌, 저 곱디곱고 어여쁜 사람,
秋波回兮眷眷. 고운 눈결 던지며 나를 못 잊네.
適駕言兮黃岡, 때마침 황주 땅을 지나가는데,
路逶遲兮遐遠. 길은 구불구불 멀기만 했네.
駐余車兮蕭寺, 내 수레를 절에 멈추고,
秣余馬兮江湄. 물가에서 내 말에 꼴을 먹였네.
豈料粲者兮遠追, 어찌 생각했으랴, 멀리까지 쫓아와
忽入夜兮扣扉. 밤 깊어서 홀연히 문 두드릴 줄.
逈野兮月黑, 먼 들판 달이 져서 캄캄도 하고,
虎嘯兮空林. 텅 빈 수풀에서 호랑이는 으르렁.
履我卽兮何意, “그 무슨 마음으로 날 따라왔나”
懷舊日之德音. “지난날 해 주신 말씀 그리워서요!”
閉門兮傷仁, 문을 닫아걸면 인(仁)이 아니고,
同寢兮害義.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
撤去兮屛障, 병풍도 치워 놓고 같은 방에서,
異牀兮異被. 다른 침상 다른 이불 펴고 앉았네.
恩未畢兮事乖, 그 사랑 다 못하고 일이 어긋나,
夜達曙兮明燭.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두었네.
天君兮不欺, 하느님을 속일 수야 없는 노릇,
赫臨兮幽室. 깊숙한 방 속까지 보고 계시니.
失氷冸之佳期, 혼인할 좋은 시기 놓쳐버린 너와,
忍相從兮鑽穴. 차마 어찌 남모르게 관계를 하랴.
明發兮不寐, 새날이 다 밝도록 잠 못 이루다,
恨盈盈兮臨岐. 이별하는 마당에 회한으로 가득.
天風兮海濤, 하늘에 바람 불고 바다에는 물결 이는데,
歌一曲兮悽悲. 노래 한 곡조 처량하고 슬퍼라.
繄本心兮皎潔, 아아 본마음 깨끗하기가,
湛秋江之寒月. 가을 강의 차가운 달빛 같거늘.
心兵起兮如雲, 어지러운 마음 구름같이 일어남에,
最受穢於見色. 그 중에도 욕정이 제일 더럽네.
士之耽兮固非, 사내의 욕정은 원래 그르고,
女之耽兮尤惑. 계집의 욕정은 더욱 문제라네.
宜收視兮澄源, 당연히 아니 보고 근원을 맑혀,
復厥初兮淸明. 맑고 밝은 본마음을 돌이켜야지.
倘三生兮不虛, 다음 세상 있다는 말, 빈말이 아니라면,
逝將遇爾於芙蓉之城. 극락세계, 부용성, 거기서 너를 만나리.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시이다. 여기서의 절창(絶唱)은 심야에 찾아온 그녀를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심사가 함축된 “문을 닫아 걸면 인(仁)이 아니고,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일 것이다. 율곡이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과 이목을 충분히 의식하였으면서도 유지를 받아들인 이유와 처신의 요결이 약여하다.
물론 이러한 결단에 유지의 지취(志趣)를 헤아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내포되어 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행에서 내면의 애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면서도 儒者로서 ‘인’과 ‘의’를 실천한 멋진 ‘인간’이었다. 끝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지 않았지만 율곡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의 절절한 사랑이 황주 기생 ‘유지’였다고 하겠다.
뒷날 '율곡집'을 편찬할 때 이 시를 넣느냐 빼느냐를 두고 편자들 간에 이견이 있었다. 주제도 주제지만 결국 빼게 된 논란의 핵심은 시의 끝 구절, “다음 세상 있다는 말, 빈말이 아니라면, 극락세계, 거기서 너를 만나리” 였을 것이다.
퇴계와 함께 조선조 성리학의 최고봉에 도달한 율곡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영혼불멸(靈魂不滅)과 내생을 믿지 않는다. 원문 ‘부용지성(芙蓉之城)’은 연화세계(蓮花世界)와 같은 말이며 이는 불교의 극락세계(極樂世界)이다. 이 말은 유학자들의 글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어(禁忌語)였다.
그래서 이 시를 뺀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도덕을 지향할수록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제일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이 시는 儒者의 율기(律己)에 성공한 사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정과의 괴리와 이데올로기화,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유학이 뒷날 사이비 군자를 양산하고 시대를 운영하는 탄력을 상실하여 연암의「양반전」에서처럼 신랄한 내부 비판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야말로 율곡의 유자로서의 인품을 그 무엇보다도 眞率하게 드러낸다고 하겠다. 끝으로 군더더기 하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로 이름난 고려 말의 이조년(李兆年)은 초상화에 그려진 손에 염주가 들려져 있다는 이유로 고향 성주(星州) 땅의 서원(書院)에도 배향(配享)되지 못했다. 율곡의 이 시편이 처음부터 공개되었더라면 율곡은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 배향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율곡이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될 때 그가 젊은 날 한 때 금강산에 입산하여 활불(活佛)로 존경받던 의암(義庵)스님이 되었던 사실만으로도 큰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선생의 부인 노씨(盧氏)는 딸 하나를 낳았을 뿐인데 그 딸이 요절(夭折)했다. “무후(無後)”, 즉 ‘후손 없음’이 가장 큰 불효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율곡도 하는 수 없이 첩을 들였는데 첩 또한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다. 부득이 또 첩을 들였고 그 첩이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그 뒤에 첫 첩도 아들을 낳았고 두 번째 첩이 또 딸 하나를 더 낳았다. 이래서 서출(庶出)이긴 하지만 2남 1녀의 자식을 얻은 것이다.
사계의 이 기록은 후인들의 흥미를 끈다. 율곡의 처소를 밤에 찾아온 기생도 범상하지 않고 율곡의 처신 역시 범상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말이 옆으로 새지만, 필자가 율곡을 존앙해 마지않는 것은 그의 성리학(性理學)이나 경장(更張) 사상때문이 아니다.
그의 이기이원적일원론(理氣二元的一元論)이나 퇴계의 이기일원적이원론(理氣一元的二元論)은 끝내 정답이 없는 논의일 수 있고 경장 사상은 그와 비견(比肩)할 사람이 한두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름 아니라 그의 효성과 우애를 존모해 마지않는다. 16세에 모친상을 26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니, 친부모에게 효성을 바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율곡은 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계모를, 어쩌면 어머니 사망의 원인 제공자였을 수도,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게 한 동기를 제공했을 수도 있는 계모를 삶이 다할 때까지 극진히 모셨다.
4남 3녀의 셋째 아들이었던 율곡은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녹봉(祿俸)을 받았으므로 일찍 죽은 큰형의 식구들을 다 먹여 살렸고 가끔 돈 문제로 사고를 치는(?) 둘째 형의 뒷수습을 도맡았으며 어린 아우의 학비도 전담했다. 그래서 늘 가난했고 요즘으로 치면 현직 장관으로 죽으면서도 서울에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대사동(大寺洞 : 오늘의 인사동) 셋집에서 세상과 영결했던 것이다. 네 것 내 것 없는 형제애! 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 정인군자(正人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설하고, “일찍이 누님을 뵈러 황주(黃州)에 갔었는데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사연이었을까? 때는 율곡이 48세이던 1583년 가을이었고 율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향(妻鄕)이자 자기의 집이 있는 황해도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있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찬성(右贊成)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지만 임금 선조(宣祖)와 끝내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해 있던 차였다. 율곡에게 두 명의 누님이 있었는데 이때 황주에 살던 누님은 누구이며 무슨 일로 누님을 찾아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간 율곡은 죽기 서너 달 전에 황주로 갔다가 “나라 안 최고 미녀〔국중일색(國中一色)〕”인 황주 기생을 만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지(柳枝)’였다. 그런데 율곡은 유지와의 조우를 계기로 자신과 유지의 사연을 직접 적어 남겼다. 이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한두 마디를 덧붙인 율곡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유지(柳枝)는 선비의 딸인데,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전락해 있었다. 내가 39세이던 1574년에 황해도 감사로 갔을 때 동기(童妓)였던 그녀가 시중을 들었다. 몸이 날씬하였고 곱게 단장하였으며, 얼굴은 빼어나고 머리는 총명했다.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겼지만, 처음부터 정욕(情慾)의 뜻을 품지는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평안도를 왕래하였는데, 유지는 매번 방 안에서 수청을 들었으나 한 번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내가 48세이던 1583년 가을에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께 문안을 갔을 때 다시 유지를 만났고 유지와 함께 여러 날 술을 마셨다. 다시 해주로 돌아올 때 유지는 연도의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유지와 헤어진 날 나는 밤고지〔栗串〕강마을 주막에서 묵었다. 한밤중에 누군가 사립문을 두들겨서 나가보니, 바로 유지였다. 유지가 방긋 웃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은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사모하는 바이옵거늘, 하물며 기생된 계집이겠습니까?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가시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려워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것이옵니다.’ 마침내 불을 밝히고 밤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단지 방탕한 사내들의 다정(多情)함만을 사랑하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기생이 있는 줄 알겠는가?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탄복을 하니, 이것은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안타까워라, 유지여! 천한 몸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구나. 또한 지나가는 과객들이 내가 혹 잠자리를 갖지 않았나 의심하여 너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國中一色)에게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지어 정(情)에서 발하되 예의(禮義)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이 점을 잘 알 것이다.…
유지와 율곡은 이미 율곡이 1574년에 황해도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만난 사이였다. 이후 전말(顚末)을 율곡 자신이 잘 말해 놓았으니 토를 달면 군더더기일 것이지만, 두 사람은 수령과 관기의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두 사람에게 이미 애정이 있었고, 보통 애정도 아니었다. 몸을 빌리지 않고 내면의 공감으로 승화시킨 감정이었다.
율곡은 유지의 어린 나이를 동정하면서도 그녀의 행실을 사랑하였고 유지는 율곡의 도의를 존경하며 사랑하였다. 사계의 기록에서 밤에 율곡의 처소로 찾아간 유지가 율곡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 별난 기생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지는 율곡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이 조우가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다시 밤에 찾아간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담소한 이튿날 아침, 영결(永訣)이 되고만 이별을 할 때 율곡은 그녀에게 장시(長詩) 한 편과 칠언절구(七言絶句) 3수를 지어준다. 이 시편(詩篇)을 적은 두루말이 원고를 「유지사(柳枝詞)」라 부르는데 원본이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있다. 너무나 절절한 「유지사(柳枝詞)」, 한 치도 숨김없이 사연을 서술하고 관련 직정(直情)과 별리(別離)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노래한다. 원시(原詩)와 필자의 서툰 번역을 아래에 실어본다.
若有人兮海之西, 여기 사람 있네, 황해도 땅에,
鍾淑氣兮禀仙姿. 맑은 기운 모아 선녀 같아라.
綽約兮意態, 그 마음 그 모습 곱기도 하고,
瑩婉兮色辭. 그 얼굴 그 목소리 맑고도 예뻐.
金莖兮沆瀣, 금 쟁반에 받아 놓은 이슬 같은 이,
胡爲委乎路傍. 어쩌다가 길가에 버려졌는가.
春半兮花綻, 봄이 한창이라 꽃도 흐드러졌는데,
不薦金屋兮哀此國香! 황금 집에서 귀하게 살지 못하다니, 슬프다 미인!
昔相見兮未開, 그 옛날 만났을 땐 피지 않은 꽃,
情脈脈兮相通. 말없이 마음만은 서로 통했네.
靑鳥去兮蹇脩, 좋은 중매쟁이 가고 없음에,
遠計參差兮墜空. 먼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展轉兮愆期, 이럭저럭 좋은 때 다 놓쳤으니,
解佩兮何時. 어느 때나 좋은 임 만나게 될꼬.
日黃昏兮邂逅, 날 저물어 우연히 다시 만나니,
宛平昔之容儀. 옛 모습 완연히 그대로 있네.
曾日月兮幾何,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던가,
悵綠葉兮成陰. 푸른 잎 그늘진 거 슬프다 슬퍼.
矧余衰兮開閤, 나 하물며 쇠약해 색을 멀리해야 하고,
對六塵兮灰心. 온갖 욕정 재같이 식어버렸네.
彼姝子兮婉孌, 저 곱디곱고 어여쁜 사람,
秋波回兮眷眷. 고운 눈결 던지며 나를 못 잊네.
適駕言兮黃岡, 때마침 황주 땅을 지나가는데,
路逶遲兮遐遠. 길은 구불구불 멀기만 했네.
駐余車兮蕭寺, 내 수레를 절에 멈추고,
秣余馬兮江湄. 물가에서 내 말에 꼴을 먹였네.
豈料粲者兮遠追, 어찌 생각했으랴, 멀리까지 쫓아와
忽入夜兮扣扉. 밤 깊어서 홀연히 문 두드릴 줄.
逈野兮月黑, 먼 들판 달이 져서 캄캄도 하고,
虎嘯兮空林. 텅 빈 수풀에서 호랑이는 으르렁.
履我卽兮何意, “그 무슨 마음으로 날 따라왔나”
懷舊日之德音. “지난날 해 주신 말씀 그리워서요!”
閉門兮傷仁, 문을 닫아걸면 인(仁)이 아니고,
同寢兮害義.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
撤去兮屛障, 병풍도 치워 놓고 같은 방에서,
異牀兮異被. 다른 침상 다른 이불 펴고 앉았네.
恩未畢兮事乖, 그 사랑 다 못하고 일이 어긋나,
夜達曙兮明燭.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두었네.
天君兮不欺, 하느님을 속일 수야 없는 노릇,
赫臨兮幽室. 깊숙한 방 속까지 보고 계시니.
失氷冸之佳期, 혼인할 좋은 시기 놓쳐버린 너와,
忍相從兮鑽穴. 차마 어찌 남모르게 관계를 하랴.
明發兮不寐, 새날이 다 밝도록 잠 못 이루다,
恨盈盈兮臨岐. 이별하는 마당에 회한으로 가득.
天風兮海濤, 하늘에 바람 불고 바다에는 물결 이는데,
歌一曲兮悽悲. 노래 한 곡조 처량하고 슬퍼라.
繄本心兮皎潔, 아아 본마음 깨끗하기가,
湛秋江之寒月. 가을 강의 차가운 달빛 같거늘.
心兵起兮如雲, 어지러운 마음 구름같이 일어남에,
最受穢於見色. 그 중에도 욕정이 제일 더럽네.
士之耽兮固非, 사내의 욕정은 원래 그르고,
女之耽兮尤惑. 계집의 욕정은 더욱 문제라네.
宜收視兮澄源, 당연히 아니 보고 근원을 맑혀,
復厥初兮淸明. 맑고 밝은 본마음을 돌이켜야지.
倘三生兮不虛, 다음 세상 있다는 말, 빈말이 아니라면,
逝將遇爾於芙蓉之城. 극락세계, 부용성, 거기서 너를 만나리.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시이다. 여기서의 절창(絶唱)은 심야에 찾아온 그녀를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심사가 함축된 “문을 닫아 걸면 인(仁)이 아니고, 잠자리를 같이하면 의(義)가 아니라네.”일 것이다. 율곡이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과 이목을 충분히 의식하였으면서도 유지를 받아들인 이유와 처신의 요결이 약여하다.
물론 이러한 결단에 유지의 지취(志趣)를 헤아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내포되어 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행에서 내면의 애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면서도 儒者로서 ‘인’과 ‘의’를 실천한 멋진 ‘인간’이었다. 끝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지 않았지만 율곡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의 절절한 사랑이 황주 기생 ‘유지’였다고 하겠다.
뒷날 '율곡집'을 편찬할 때 이 시를 넣느냐 빼느냐를 두고 편자들 간에 이견이 있었다. 주제도 주제지만 결국 빼게 된 논란의 핵심은 시의 끝 구절, “다음 세상 있다는 말, 빈말이 아니라면, 극락세계, 거기서 너를 만나리” 였을 것이다.
퇴계와 함께 조선조 성리학의 최고봉에 도달한 율곡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영혼불멸(靈魂不滅)과 내생을 믿지 않는다. 원문 ‘부용지성(芙蓉之城)’은 연화세계(蓮花世界)와 같은 말이며 이는 불교의 극락세계(極樂世界)이다. 이 말은 유학자들의 글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어(禁忌語)였다.
그래서 이 시를 뺀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도덕을 지향할수록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제일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이 시는 儒者의 율기(律己)에 성공한 사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정과의 괴리와 이데올로기화,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유학이 뒷날 사이비 군자를 양산하고 시대를 운영하는 탄력을 상실하여 연암의「양반전」에서처럼 신랄한 내부 비판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야말로 율곡의 유자로서의 인품을 그 무엇보다도 眞率하게 드러낸다고 하겠다. 끝으로 군더더기 하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로 이름난 고려 말의 이조년(李兆年)은 초상화에 그려진 손에 염주가 들려져 있다는 이유로 고향 성주(星州) 땅의 서원(書院)에도 배향(配享)되지 못했다. 율곡의 이 시편이 처음부터 공개되었더라면 율곡은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 배향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율곡이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될 때 그가 젊은 날 한 때 금강산에 입산하여 활불(活佛)로 존경받던 의암(義庵)스님이 되었던 사실만으로도 큰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